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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vs 휴머니즘 영화로 만나는 자아 이야기 (철학, 감정, 의미)

by gksso 2025. 4. 28.

삶의 본질을 묻는 질문은 인류의 오랜 화두였습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인생에 의미는 있는가?” 같은 물음은 철학책 속에만 머물지 않고, 영화라는 예술 속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특히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은 자아를 탐색하는 데 있어 서로 다른, 그러나 모두 깊은 울림을 주는 시선을 제공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실존주의적 시선과 휴머니즘적 시선을 담은 영화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려 하는지를 살펴봅니다. 철학과 감정, 의미가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조금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포스터

실존주의 영화가 들려주는, 혼자 존재하는 인간의 외로움과 선택의 무게

실존주의는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과 고독, 그리고 자유의 책임을 강조하는 철학입니다. 영화 속 실존주의는 종종 극한 상황에 놓인 인물을 통해 드러납니다. 대표적으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선과 악, 정의와 부조리 같은 이분법적 기준이 무너진 세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주인공은 범죄자와 경찰 사이에서 도망치고 추격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필연적 운명처럼 차갑게 흘러갑니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세상의 무의미함과 맞닥뜨립니다. 이 영화는 선택이 반드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선택마저 무의미해질 수 있음을 냉정하게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조용히 묻게 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도 실존주의적 요소를 품고 있습니다. 사랑의 기억을 지워버린다는 설정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이 선택한 감정마저 후회하고 두려워합니다.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고통을 없애려는 시도가 오히려 더 깊은 공허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실존주의가 말하는 '존재의 고통'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실존주의 영화들은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집니다. 의미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 사랑, 고통, 실패를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답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질문 자체를 껴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실존주의 영화가 가지는 진정한 힘입니다. 우리는 이 영화들을 통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되고, 그 질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정직하게 마주하게 됩니다.

휴머니즘 영화가 전하는, 인간 본연의 따뜻함과 회복의 가능성

반면, 휴머니즘은 인간 존재의 고귀함과 변화 가능성을 믿습니다. 아무리 상처받고 망가졌더라도, 인간은 스스로를 회복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휴머니즘적 시선을 담은 영화들은 우리에게 끝내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대표적으로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은 절망의 끝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성에 대해 노래합니다. 감옥이라는 가장 폐쇄적이고 비인간적인 공간에서도, 주인공 앤디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작은 돌조각을 다듬고, 도서관을 세우며, 음악을 틀어 동료 죄수들에게 자유의 감정을 선사합니다. 절망 속에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지켜낸 결과, 그는 결국 자유를 얻고 세상을 다시 품습니다. ‘쇼생크 탈출’은 말합니다. 인간은 상황에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존재라고. 또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는 평범한 인물이 상상의 세계를 넘어 진짜 모험을 떠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따뜻하게 그려냅니다. 월터는 처음에는 소심하고 조심스럽지만, 결국 진짜 세상을 만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합니다. 휴머니즘 영화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휴머니즘 영화들은 상처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품고, 그 안에서 다시 일어서는 인간의 힘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영화들을 통해, 타인과 연결될 때 비로소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래서 휴머니즘 영화는 감동적이지만, 결코 단순한 감상에 그치지 않습니다. 깊은 상처 위에 새로 피어나는 따뜻한 가능성, 그것이 휴머니즘 영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선물입니다.

실존주의와 휴머니즘,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결국 같은 곳을 향하다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은 얼핏 보면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인간 존재의 비극성과 고독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인간성의 회복 가능성과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이 두 시선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실존주의 영화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할 때, 너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그리고 휴머니즘 영화들은 답을 줍니다. "상처받아도 괜찮아, 다시 살아갈 수 있어." 질문과 답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구조입니다. 때로 우리는 삶이 버거워 실존주의적 질문에 매몰될 때가 있고, 또 어떤 날에는 휴머니즘적 희망을 통해 스스로를 다독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실존주의는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게 만들고, 휴머니즘은 그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설 힘을 줍니다. 영화라는 예술은 이 두 시선을 아름답게 직조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쓸쓸한 침묵 속에서도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고, ‘쇼생크 탈출’의 밝은 희망 속에도 삶의 깊은 고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색깔의 영화를 만나는 경험은, 마치 우리 삶 자체를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결국 자아를 찾는 여정에서 우리는 실존주의의 차가운 질문과 휴머니즘의 따뜻한 응원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야만 합니다. 두 철학이 만들어내는 영화들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답을 끌어안고 그 사이를 걸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어쩌면, 조금 더 깊고 단단한 ‘나’를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